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첨단 의학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가족이 큰 수술을 받았던 시기, 병원 복도를 매일 오가면서 저는 좋은 의사와 좋은 약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위트(Wit)를 보기 전까지는요.

환자는 데이터가 아니다 — 의료 현장의 비인격화 문제
영화의 주인공 비비안 베어링은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 존 던(John Donne)의 성스러운 소네트(Holy Sonnets)를 전공한 저명한 교수입니다. 그는 진행성 전이성 난소암(advanced metastatic ovarian cancer), 즉 암세포가 난소를 넘어 복강 전체로 퍼진 4기 상태라는 진단을 받고 임상시험에 참여합니다. 담당 의사 키키안 박사는 헥사메토실(Hexamethosil)과 빈플라틴(Vinplatin)의 실험적 병용 요법을 제안합니다. 헥사메토실과 빈플라틴은 세포 분열을 억제하는 세포독성 항암제(cytotoxic chemotherapy agent)로, 암세포를 공격하는 동시에 정상 세포까지 손상시키는 강력한 약물입니다.
문제는 이 치료가 환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의료진이 거의 묻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의사들은 회진 때 비비안을 앞에 두고 "1차 세포축소술(primary cytoreduction) 이후 림프 전이 전범위 확인"이라며 수치를 주고받습니다. 세포축소술이란 종양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암 조직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수술 방법인데, 비비안은 그 자리에서 마치 해부학 모형처럼 취급됩니다. 그는 스스로 중얼거립니다. "완전히 집에 온 것 같다. 대학원 세미나와 똑같다."
이것이 단순한 영화적 과장인지 의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국내 연구를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암 환자가 치료 과정에서 겪는 심리적 고통은 신체적 통증만큼이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의료진과의 소통 부족이 환자의 치료 순응도와 정서적 안정에 직접 영향을 준다는 점은 현재 의료계에서도 꾸준히 논의되고 있습니다(출처: 국립암센터).
비비안의 경우 골수억제(myelosuppression)라는 부작용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골수억제란 항암제가 골수의 조혈 기능을 떨어뜨려 백혈구 수치가 급격히 낮아지는 현상으로, 쉽게 말해 면역 체계 자체가 무너지는 상태입니다. 발열과 호중구 감소증(neutropenia)이 동반되면 감염 위험이 극도로 높아집니다. 담당 간호사 수지는 용량을 낮추자고 제안하지만, 키키안은 "풀 도즈(full dose)"를 고집합니다. 연구 데이터를 위해서요.
영화가 보여주는 핵심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 없이 임상시험 동의를 받는 구조
- 회진 시 환자를 대상(object)이 아닌 증례(case)로 다루는 태도
- 고통 완화보다 연구 성과를 우선시하는 의료진의 가치 충돌
- 외부 방문자 없이 홀로 병실을 지키는 환자의 극단적 고립
쉼표 하나의 무게 — 완화의료와 인간적 돌봄의 의미
존 던의 소네트 6번에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죽음이여, 자만하지 마라, 너는 죽을 것이니(Death be not proud… Death thou shalt die)." 비비안의 스승 애쉬퍼드 교수는 젊은 시절 그에게 "쉼표 하나가 삶과 영원한 삶을 구분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형이상학적 기지(metaphysical conceit), 즉 전혀 다른 두 개념을 기발한 비유로 연결하는 17세기 시의 핵심 기법인데, 그 기법이 비비안의 실제 죽음 앞에서 다시 소환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죽음에 관한 시를 평생 연구한 사람이 정작 자신의 죽음 앞에서 가장 필요로 한 것은 학문적 통찰이 아니라 "나 무서워"라는 말을 들어줄 사람 하나였습니다.
완화의료(palliative care)는 이 지점에서 등장합니다. 완화의료란 완치가 불가능한 환자에게 통증과 증상을 조절하고 정서적·심리적 지지를 제공하는 의료 접근법으로, 치료가 아닌 삶의 질 향상에 초점을 맞춥니다. 영화에서 수지 간호사가 비비안에게 아이스크림바를 건네고 나란히 앉아 그의 두려움을 들어주는 장면은 완화의료의 본질을 아주 단순하게 보여줍니다. 거창한 말이 없습니다. 그냥 옆에 있는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가족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저는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좋은 음식을 가져오고, 의사에게 더 나은 치료를 요청하고, 검사 결과를 미리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족이 말했습니다. 그냥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을 때가 제일 좋았다고요. 영화는 그 사실을 비비안의 입을 빌려 정확히 짚어냅니다.
DNR(Do Not Resuscitate), 즉 심폐소생술 거부 의사를 결정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DNR이란 심정지가 발생했을 때 적극적인 소생술을 시행하지 않겠다는 환자의 사전 의향 결정으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와 직결됩니다. 수지는 비비안에게 이 선택지를 조용히 설명하고, 비비안은 "복잡하게 만들지 마세요"라고 답합니다. 반면 제이슨은 DNR 차트를 확인하지 못하고 코드 블루를 호출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연구자의 본능이 환자의 의지보다 앞선 순간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완화의료를 단순한 말기 치료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을 가진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제공되어야 할 통합적 접근법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 WHO). 그러나 현실에서 완화의료의 비중은 여전히 낮습니다. 비비안의 병실이 텅 빈 이유도, 결국 제이슨이 코드를 누른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위트는 죽음을 다루지만 비극 영화가 아닙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것은, 이 영화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나는 데이터처럼 대하고 있지 않은지.
영화 속 비비안이 마지막에 얻은 위로는 스승의 학술적 조언도, 최신 항암제도 아니었습니다. "도망치는 토끼"를 읽어주는 노교수의 목소리였습니다. 빠른 전개를 좋아하는 분께는 다소 느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어느 지점에서 비슷한 경험을 겪어보신 분이라면, 이 영화의 느린 속도가 오히려 정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지금 주변 사람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한 셈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 조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