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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버티기, 현장직, 고소공포증)

by hello-ellie1 2026. 6. 10.

나는나를해고하지않는다 포스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틀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직장 드라마겠거니 했는데,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단순히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제 과거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일이 많아도 참고, 불만이 있어도 참고, 그게 버티는 거라고 믿었던 시절이요.

 

버티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다르다

저도 처음엔 그냥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힘들다고 말하는 게 오히려 나약하게 보일까 봐, 그냥 계속 밀어붙이는 방식을 선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그건 버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계속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정은도 처음에는 그냥 버팁니다. 회사 창고 구석에 박혀 있다가 시골 하청 업체로 내려보내지는 상황에서도, 1년 뒤 본사 복귀라는 조건 하나만 붙들고 자리를 지킵니다. 그런데 그녀가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게, 현장직 업무를 밤새워 공부하면서 드러납니다. 버티는 게 아니라 살아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영화는 주인공이 극적으로 시스템을 무너뜨리거나 통쾌한 복수를 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릅니다. 변화는 조용하고 더디게 옵니다. 그 점이 오히려 더 사실적으로 느껴졌고, 제 경험상 이건 현실에 훨씬 가깝습니다. 직장에서 무언가를 증명하는 과정은 결코 드라마틱하지 않으니까요.

현장직 현실, 알고 보니 몰랐던 것들

이 영화를 보면서 고압 송전탑 작업 환경에 대해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됐습니다. 정은이 현장에 합류하면서 마주치는 것들이 하나하나 낯섭니다. 저 역시 그 장면들이 낯설었고, 그게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고압 활선 작업(活線作業)이란 전기가 흐르는 상태의 송전선을 직접 다루는 작업을 말합니다. 전기를 차단하지 않고 진행하기 때문에 감전 사고 위험이 상시 존재하며, 특수 절연 장비 없이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영화에서 비 오는 날 철탑에 올라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날처럼 도체(導體), 즉 전기가 잘 통하는 물질인 금속이나 물이 있는 환경에서는 감전 위험이 배가됩니다. 작업자들이 몸에 철심 같은 도체를 지니고 올라가면 안 된다는 장면이 그냥 스치는 대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사가 걸린 안전 수칙입니다.

제가 직접 이 환경을 경험한 건 아니지만, 제 경험상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환경"이라는 감각은 압니다. 어떤 조직에서는 당연히 지급돼야 할 것들이 "공짜가 어딨냐"는 식으로 취급되기도 하니까요. 영화 속 작업자들이 낡고 불량한 작업복을 입고 산을 오르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하청 구조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고소 작업(高所作業), 즉 지상 2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에는 추락 방지를 위한 안전대 및 안전난간 설치가 의무입니다(출처: 고용노동부). 그럼에도 현장에서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이 영화는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하청 구조 속 고소공포증이라는 이중 장벽

일반적으로 고소공포증은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여겨지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환경이 그 공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고소공포증(高所恐怖症, Acrophobia)이란 높은 곳에 있을 때 공황에 가까운 공포 반응을 경험하는 불안 장애의 일종입니다. 단순히 무섭다는 감각을 넘어서, 심박수 상승과 다리에 힘이 풀리는 신체 반응까지 동반됩니다. 정은이 철탑 앞에서 얼어붙는 장면이 과장처럼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 공포를 극복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충식이 정은에게 "저는 저 철탑을 지켜야 할 우리 딸들이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기술이나 훈련이 아니라, 지키고 싶은 것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공포를 다루는 거죠. 심리학에서 말하는 노출 치료(Exposure Therapy)의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노출 치료란 두려운 상황에 반복적으로 조금씩 노출시켜 공포 반응을 점차 줄여나가는 인지행동치료 기법입니다.

그런데 정은이 싸우는 건 공포 하나만이 아닙니다. 원청의 압박, 하청 소장의 배제, 동료들의 투명인간 취급까지. 이 영화에서 제가 주목한 건 수직 계열화된 하청 구조입니다. 수직 계열화란 원청 기업이 하청 업체를 통해 실질적인 지휘·통제권을 행사하면서도 법적 책임은 분리하는 구조를 말합니다. 충식의 해고 위기나 산재 처리를 거부하는 장면이 이 구조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산업재해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영화가 말하지 않은 것, 영화가 보여준 것

이 영화에서 제가 직접 느낀 건 주인공의 승리보다 과정에 있었습니다. 정은이 끝내 무언가를 쟁취하는 장면보다, 넘어지고 멈추고 다시 한 발 내딛는 장면들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해봤습니다. 저도 그 시절에 "이건 버티면 끝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사실 그게 끝난 게 아니라 그냥 넘긴 것들이 많았다는 걸요. 해소되지 않은 것들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돌아오더라고요.

이 영화가 단순한 노동 고발 영화가 아닌 이유는,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묻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주목할 만한 포인트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직무 습달 평가(직무 숙달도를 체계적으로 측정하는 평가 방식)에서 드러나는 이질감
  • 원청과 하청 사이에서 어느 편도 아닌 정은의 위치
  • 충식이 해고를 죽음보다 무서워하는 이유, 그리고 정은이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

이 세 장면이 교차하는 순간,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보고 나면 묵직한 여운이 남는 작품입니다. 극적인 사건보다 조용한 감정의 축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기 때문에, 빠른 전개를 기대하면 지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느린 속도 자체가 이 영화의 의도처럼 느껴졌습니다. 일이라는 것, 버티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우하는가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고 싶으신 분께 권해드립니다. 직접 본편으로 정은의 선택을 끝까지 따라가 보시길 바랍니다.


참고: https://youtu.be/FpYqhSkpgS4?si=3lp8RGxR7Y2pNXg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