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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해자에게 드라마 (학교폭력, 가해자, 피해자)

by hello-ellie1 2026. 5. 10.

솔직히 이건 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함이 싫지 않았습니다. 드라마 나의 가해자에게는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교사가 13년 뒤 자신의 가해자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이렇게 오래 머릿속에 남는 단편 드라마가 흔치 않습니다.

나의가해자에게 포스터

가해자는 잊고, 피해자는 기억한다

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상대방이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말 한마디가 며칠이고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경험 말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예전에 누군가가 가볍게 던진 말 때문에 꽤 오랫동안 마음 한쪽이 무거웠던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분명 기억도 못 할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냥 제가 예민한 건가 싶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때 제가 상처를 받았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이 드라마는 그 감각을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3년 차 교사 송진우는 새로 부임한 신입 교사 유성필의 얼굴을 보자마자 굳어버립니다. 13년 전 자신의 학창 시절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필은 진우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기억은 이렇게 다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맥락으로 설명합니다. PTSD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이후에도 그 기억이 반복적으로 침습하거나 회피 반응이 나타나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성인기 이후까지 정신건강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국내외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울·불안 수준을 높이고 대인관계 기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드라마가 더 씁쓸한 이유는 가해자 개인의 문제만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우가 학창 시절에 마지막으로 기댔던 담임 선생님조차 외면했다는 설정, 그리고 현재 진우 역시 교실에서 벌어지는 괴롭힘 앞에서 자꾸 눈을 돌리게 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방관자 효과란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이 개입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덜 느끼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드라마는 그 방관을 어른도, 아이도, 교사도 모두 반복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제가 보면서 가장 오래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드라마 속 피해 학생 이은서가 수십 번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는 설정은 과장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학교폭력 피해 학생 다수가 주변에 알렸음에도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했다고 응답하는 통계와 겹쳐 보였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은서가 "제가 안 해봤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말문이 막혔습니다.

학교폭력과 관련한 피해 학생의 심리적 회복에 있어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신뢰할 수 있는 어른(교사·보호자)의 즉각적 개입과 지지
  • 피해 사실에 대한 공식적 인정과 가해자 책임 부여
  • 지속적인 심리 상담 및 회복적 정의 프로세스 적용
  • 주변 또래의 방관 문화 개선을 위한 학교 차원의 교육

좋은 메시지가 좋은 연출을 보장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완성도 면에서도 좋은 작품이었을까요? 저는 메시지와 연출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메시지는 분명히 묵직했습니다. 가해자는 잊고 피해자는 평생 기억하는 구조, 방관을 선택한 교사가 결국 자신도 방관자가 되는 아이러니, 그리고 복수가 아닌 반복의 고리를 끊겠다는 진우의 다짐까지. 이 주제들은 단편 드라마가 담기에 충분히 밀도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캐릭터 심리 묘사가 생각보다 빠르게 건너뛰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교사로 성장하기까지 진우 내면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그 중간의 감정적 무게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채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몇 번 들었습니다. 내러티브 밀도(narrative density)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러티브 밀도란 단위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서사 정보가 압축되어 있는가를 가리키는데, 이 드라마는 러닝타임 제약 탓인지 밀도가 다소 고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진우가 희진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또 거부하고, 다시 자리를 원위치시키는 일련의 과정이 인물의 내적 결심보다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종류의 드라마는 인물이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장면이 설득력을 가질 때 훨씬 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반면 감정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특히 진우가 교실에서 혼자 OJT 파일을 찢는 장면, 그리고 은서의 "도와주세요"라는 말에 말문이 막히는 장면은 대사 없이도 충분히 전달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연출이 감정을 앞서지 않고 배우를 믿어준 몇 안 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학교폭력 문제를 다루는 창작물에 있어 전문가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 중 하나가 피해자 중심 서사(victim-centered narrative)입니다. 피해자 중심 서사란 피해자의 감정과 경험을 드라마적 장치로만 소비하지 않고, 피해자가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중심에 두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드라마는 그 방향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완전히 도달했다고 보기에는 조금 아쉬운 지점이 남습니다. 국내 학교폭력 예방 및 대응 정책의 방향 역시 피해자 보호와 심리 회복 지원을 우선순위로 설정하고 있습니다(출처: 교육부 학교폭력예방교육지원센터).

그래도 한 시간 안쪽의 러닝타임에 이만한 메시지를 담아낸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보고 나서 한동안 쉽게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저는 그게 이 작품을 볼 이유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드라마가 남긴 질문은 하나로 수렴됩니다. 누군가에게 이미 끝난 기억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일 수 있다는 것, 그 온도 차이를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경험 이후로 저도 말 한마디를 조금 더 조심하게 됐고, 상대가 괜찮아 보인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건 아닐 수 있다는 걸 더 자주 떠올리게 됐습니다. 드라마 나의 가해자에게는 현재 웨이브, 왓챠, 애플 TV에서 풀 버전으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불편하더라도 끝까지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참고: https://youtu.be/fTfjL7D8Ff8?si=Wb5Y6jDaLJcNnHX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