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이 개봉한 지 올해로 10년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도 인터넷 커뮤니티 어딘가에서는 "무명이 선인가 악인가", "외지인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 결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한동안 머릿속에서 장면들을 계속 되돌렸습니다. 10년이 지나도 해석이 갈리는 영화, 도대체 곡성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요.

외지인은 단순한 악령이 아니다
영화 속 외지인을 처음 본 관객이라면 "그냥 나쁜 귀신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훨씬 복잡합니다.
초기 시나리오에 따르면 외지인의 이름은 나카무라 히데오시로, 일본에서 수십 건의 살인을 저지르고 1946년 한국으로 도주한 인물입니다. 영화의 배경인 2016년을 기준으로 역산하면 최소 90세 이상이어야 하는데, 화면 속 그는 그 나이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성육신(成肉身)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성육신이란 신적 존재가 인간의 육체를 입고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나홍진 감독이 외지인 캐릭터를 구상할 때 이 개념을 직접 참고했다고 밝힌 만큼, 외지인은 죽지 않는 존재이되 인간의 살과 뼈를 가진 채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읽힙니다.
또한 외지인의 몸 안에는 단 하나의 혼이 아니라 여러 악령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때로는 짐승의 형상으로, 때로는 멀쩡한 인간의 말을 구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밀교의 일파인 타치가류는 인간의 욕망 자체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인간의 해골을 본존불로 모시기도 했는데 외지인의 제단과 추화책은 이 이단 밀교의 흔적을 강하게 풍깁니다. 여기에 일본 신토 신앙의 재앙신 개념, 즉 억울하게 죽은 자가 악령이 되어 마을에 역병을 내린다는 믿음까지 덧씌워져 있습니다.
믿음과 의심, 종구가 계속 최악의 선택을 하는 이유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 질문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종구는 딸 효진을 살리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이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가 내리는 선택마다 상황이 나빠집니다. 그 이유가 개인의 우둔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외지인은 빙의(憑依)를 통해 상대방에게 의심을 심는 존재입니다. 빙의란 외부의 혼령이 인간의 육체나 정신에 침입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영화 속 기록을 보면 종구가 외지인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시점과 효진의 상태가 나빠지는 시점이 일치합니다. 의심이 깊어질수록 외지인의 힘이 강해지는 구조입니다.
저는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낯선 환경에서 작은 문제 하나가 생기면 괜히 걱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경험이 있습니다. 아이 어린이집 적응 문제라든가, 집 구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때 저도 모르게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영화 속 상황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불안이 커질수록 객관적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겹쳐 보였습니다.
무명은 종구에게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리라"는 믿음의 시험을 내립니다. 그녀의 말은 성경의 언어를 직접 빌리고 있는데, 신학에서 이를 신앙의 순종(obedience of faith)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합리적 설명 없이 먼저 믿음을 요구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을 빌리면 믿음이 먼저이고 이해는 그 뒤에 따라옵니다. 하지만 종구는 끝내 의심을 택합니다. 딸을 살리려는 가장 인간적인 본능이 오히려 그를 파멸로 이끄는 아이러니입니다.
무명과 외지인의 공성전,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무명은 선한 존재일까요? 저는 이 질문이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성전(攻城戰)이란 성을 차지하기 위해 공격자와 수비자가 벌이는 싸움을 말합니다. 나홍진 감독은 이 개념을 직접 언급하며 곡성이라는 공간을 두고 외지인과 무명이 벌이는 싸움을 공성전이라 표현했습니다. 문제는 무명도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박춘배를 덫으로 이용하고, 효진을 외지인을 봉인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하며, 피해자들의 옷을 입고 빙의해 종구 앞에 나타납니다.
곡성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초월적 존재들의 싸움에서 인간의 역할이 철저하게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곡성 영화의 서사 구조를 분석한 연구에서도 "인간 주체성의 무력화"가 핵심 주제 중 하나로 꼽힙니다(출처: 한국영화학회). 종구는 딸을 살리려 했고, 이삼은 믿음으로 악을 맞서려 했으며, 일강은 나름의 논리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이 싸움의 결말에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속 초월적 존재들의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외지인: 인간의 의심을 먹고 자라며, 성육신한 상태로 고통을 느끼지만 죽어야만 더 강한 존재로 각성한다.
- 무명: 인간의 믿음을 통해 힘을 얻으며, 산신처럼 자연물을 통해 경고를 전하지만 결국 패배한다.
- 일강: 외지인을 허주(虛主)로 모시는 존재. 허주란 신을 불렀으나 실제로는 악령이 들어온 경우를 무속에서 부르는 말입니다.
10년이 지나도 논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
왜 곡성은 아직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낳고 있을까요?
저는 그 답이 감독의 의도적인 편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나리오에는 외지인의 정체와 무명의 패배가 훨씬 더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었지만, 나홍진 감독은 8개월간의 편집 과정에서 그 결정적 단서들을 대거 삭제했습니다. 외지인이 짐승처럼 기어다니다 갑자기 인간의 말을 하는 삭제 장면이 남아 있었다면 그의 정체는 확실해지지만, 동시에 영화가 던지는 질문도 사라졌을 겁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된 지금, 효진이 아버지 종구의 심리가 이전보다 훨씬 입체적으로 읽힙니다.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인터넷을 뒤지고 온갖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는데, 그 불안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제가 직접 겪어보니 알게 됐습니다. 영화 속 종구의 선택들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실 그 어리석음은 우리 모두의 것일 수 있습니다.
한국 공포영화의 서사 전통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한국 공포 장르는 단순 오락에서 사회적 불안과 공동체 해체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습니다(출처: 한국문화관광연구원). 곡성은 그 흐름의 정점에 있는 작품입니다.
개봉한 곡성이 선악을 단정 짓는 대신 공성전만을 보여주는 선택을 한 것, 그리고 마지막 화면을 종구의 얼굴로 마무리한 것은 결국 이 이야기가 신과 악마의 싸움이 아니라 그 싸움에 일방적으로 휘말린 인간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신다면, 처음 봤을 때와 다른 장면에서 멈추게 될 겁니다. 저는 이번에 효진의 머리핀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에서 가장 오래 멈췄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지나쳤던 장면이었는데요.